AI 붐 지탱하는 ‘수십억달러 장기 계약’의 함정...“시장 꺾이면 무용지물”
AI 산업 전반이 수십억달러 규모의 장기 공급 계약을 기반으로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지만, 시장이 둔화하면 이러한 계약이 예상만큼 강력한 안전판이 되지 못할 수 있다는 경고가 제기됐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19일(현지시간) 메모리 칩부터 클라우드, AI 칩, 장비 업체에 이르기까지 공급망 전반이 장기 계약으로 얽혀 있는 만큼, 수요가 꺾이면 연쇄적인 계약 재협상과 실적 둔화가 발생할 수 있다는 업계 관계자들의 분석을 소개했다. AI 산업에서는 최근 대규모 장기 계약이 사실상 생태계를 지탱하는 핵심 장치로 자리 잡고 있다. AI 모델 개발사들은 클라우드 사업자와 장기 컴퓨팅 계약을 체결하고, 클라우드 업체는 AI 서버와 GPU를 대량 구매하며, 반도체 제조사들은 다시 파운드리 및 장비 업체들과 장기 공급 계약을 맺는 구조가 형성됐다. 이 가운데 가장 극적인 변화가 나타난 분야는 메모리 칩 시장이다. AI 에이전트 확산으로 고대역폭메모리(HBM)를 비롯한 메모리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마이크론 등 주요 업체들은 과거보다 훨씬 긴 기간의 공급 계약을 체결하고 있다. 특히 마이크론은 최근 5년 기한의 '전략적 고객 계약'을 적극 확대하고 있다. 이 계약은 '테이크 오어 페이(Take-or-Pay)' 방식으로, 고객이 실제 물량을 인도받지 않더라도 계약한 금액을 지급해야 한다. 산제이 메흐로트라 CEO는 이러한 계약이 앞으로 회사 매출의 절반 이상을 차지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SK하이닉스도 최근 뉴욕 증시 상장 이후 메모리 공급 부족이 2028년까지 이어질 것으로 전망하며 장기 계약이 메모리 산업의 안정성을 높이는 역할을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투자자들은 이러한 계약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올해 들어 마이크론 주가는 약 3배 상승했고, SK하이닉스도 비슷한 수준의 상승률을 기록했다. 삼성전자 주가도 두 배 가까이 올랐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러한 장기 계약이 경기 하강 국면에서도 그대로 유지될 것이라는 가정은 위험하다고 지적한다. 메모리 수요가 예상보다 빨리 꺾이면, 계약 기간이 남아 있더라도 실제로는 공급 일정이 연기되거나 계약 자체가 재협상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공급업체 입장에서도 고객이 사용하지 않을 제품을 강제로 출하하는 것은 장기적인 고객 관계를 해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고객이 사용하지 않는 반도체를 공급하면 재고만 증가하게 되고, 이후 수요가 회복되더라도 고객은 먼저 기존 재고를 소진한 뒤 신규 구매에 나서기 때문에 반도체 업체의 매출 인식도 지연될 수 있다. 과거 코로나19 반도체 공급난 당시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반도체 부족으로 장기 공급 계약이 크게 늘어났지만, 공급 부족이 과잉 공급으로 전환되자 대부분의 계약은 유연하게 조정됐다. 자동차용 마이크로컨트롤러 업체인 마이크로칩 테크놀로지는 2021년 공급난 당시 '우선 공급 프로그램'을 운영했지만, 이후 시장이 침체하자 고객들에게 계약 예외를 허용했다. 스티브 상기 CEO는 지난해 "고객이 필요하지 않은 제품을 억지로 구매하도록 강요하지 않는다"라며 계약보다 고객 관계를 우선시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이 같은 현상은 메모리 시장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오픈AI는 오라클과 초대형 클라우드 계약을 체결했고, 오라클과 코어위브 같은 클라우드 사업자들은 다시 AI 서버와 GPU 구매 계약을 확대하고 있다. 엔비디아 등 AI 칩 업체들은 TSMC와 생산 계약을 맺고 있으며, TSMC는 다시 ASML 등 반도체 장비 업체들과 장기 공급 계약으로 연결돼 있다. 실제 계약 규모도 천문학적이다. 오라클은 지난 회계연도 말 기준 아직 이행하지 않은 계약 잔액이 6380억달러(약 943조원)에 달한다고 밝혔다. 힐러리 맥슨 CFO는 이를 "앞으로 매출 성장에 대한 매우 높은 가시성을 제공하는 장기 계약"이라고 설명했다. AI 투자 확대와 함께 계약 잔액도 급증하고 있다. 2025년 중반 이후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오라클 등 4개 주요 AI 투자 기업들의 계약 잔액은 총 1조달러(약 1500조원) 이상 증가하며 두 배 넘게 확대됐다. 그러나 국제결제은행(BIS)은 최근 연례 경제보고서를 통해 이러한 장기 계약이 오히려 과잉 투자를 확대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기업들이 미래 생산능력을 선점하기 위해 장기 계약을 경쟁적으로 체결하면서 공급 부족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으며, 앞으로 수요가 예상보다 감소하면 충격도 더 커질 수 있다는 분석이다. 결국 AI 산업이 현재의 성장세를 유지한다면 장기 계약은 안정적인 수익 기반으로 작용하겠지만, 시장이 둔화하면 계약 재협상과 공급 연기, 재고 증가 등이 공급망 전반으로 번지며 투자자들이 기대하는 '매출 가시성'도 빠르게 흔들릴 수 있다는 지적이다. 박찬 기자 cpark@aitimes.com